천성경 제7편 4장 2절 8항
영적 현상은 하나님에 의한 영적 현상과 그 반대 현상,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금방 알게 됩니다. 즉 선한 현상과 악한 현상으로 나뉘는데, ‘선한 현상은 이렇게 돼야만 한다.’라는 공식적인 맥이 있습니다. 이것을 계속 맞추어 가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됩니다. 그래서 몇 백년마다 대전환기라든가 영적인 대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나라가 망하든가 흥하든가 합니다. 나라가 망하게 될 때는 악령이 동원됩니다. 또 크게 번성할 때는 선한 영이 동원됩니다. 그것을 어떻게 하면 세계의 운세에 말려들게 하느냐?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영적 현상이라든가 종교의 목적은 도대체 뭐냐? 영적 현상을 일으켜 하늘이 섭리를 이끌어 가는 것도 결국은 인간 완성 때문입니다. 
악신의 역사나 선신의 역사나 출발은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결과가 다릅니다. 떨고 야단하고 뒤넘기치는 일이 벌어집니다. 똑같다는 것입니다. 악신도 신령역사를 하는데, 결국은 역사해서 어디로 들어가느냐? 세계의 이익으로, 하늘과 땅의 이익으로 돌아가지 않고 자기 이익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꺾이는 것입니다. 자기를 중심삼고 개인적인 이익으로, 자기 가정을 위주로 한 이익으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그것도 꺾여 나간다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섭리는 출발은 같은 모양으로 하더라도 반드시 세계를 표준으로 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해방과 인류의 해방을 목표로 하지 않는 교회는 끝날까지 못 갑니다. 자기 욕심만큼 가다가는 자연히 무너집니다. 그 지도자를 데려가는 것입니다. 데려가게 되면 그 시대의 환경을 가누어서 연결시킬 수 없습니다. 자기가 처해 있는 위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인간세계에 살고 있는 여러분은 인간세계를 중심삼고 영적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어느 시대나 어떤 때나 종교인은 물론이고 그 외의 사람들도 영계의 인연을 따라서 영계와 혼합된 생활권에서 살고 있는 것은 역사적 실증입니다. 역사과정을 통해서 그렇게 생활해 나왔다는 사실은 우리가 종교를 믿지 않더라도 꿈을 통해서라든가 여러 가지 신비로운 체험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계를 보면 선한 신과 악한 신이 있고, 지상에서는 그 영향을 받아서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으로 나뉘게 됩니다. 그것은 이론적인 결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좋고 나쁜 사람이라는 이 개념은 뭐냐? 좋은 신의 협조를 받는 사람과 나쁜 신의 협조를 받는 사람이 있는데, 그 두 종류의 내용을 놓고 좋은 사람 또는 나쁜 사람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영적 현상까지 볼 수 있는 것을 발명하는 시대가 올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영계가 없다는 말을 할 수가 없게 됩니다. 영안이 열리면 영계를 볼 수 있습니다. 모든 현상을, 그 세계 존재의 모든 것을 감각적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날씨예보처럼 그런 것을 볼 수 있게 되면 하나님이 없다는 등의 말을 못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종교 따위는 없어져도 됩니다. 타락하지 않았다면 그런 세계가 되었을 것입니다. 타락세계가 되어서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복귀과정에서 우리에게는 이 지상이 그 세계와 상대적으로 일치시켜 가는 훈련소가 되어 있습니다.
이적 기사는 그 대가를 치른다
하나님의 협조는 원리원칙이 형성되는 데서 벌어집니다. 무모한 신앙은 하나님이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적 기사를 바라고 ‘절대로 믿는 대로 되지.’ 하던 사람은 어떻게 됐습니까? 이적 기사를 행한 사람은 그 자신과 그 일족이 어떻게 됐습니까? 한국에서 유명했던 부흥사들, 과거에 이름난 사람들 자신과 그 후손이 좋았습니까? 좋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맹목적으로 요구해서 된 후에는 반드시 맹목적으로 요구한 그 대가를 그 자신이 요구받습니다. 내가 그런 능력을 행했으면 나 자신이 그런 능력을 움직일 수 있는 자체가 됐느냐 할 때, 그렇게 못 돼 가지고 하나님의 힘에 의해서 하게 된다면 그 자신이 받은 복으로 말미암아, 받은 일로 말미암아 침해를 받는 것입니다. 기반이 없으면 왕창 무너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모세가 이적 기사를 행하지 않았으면 망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이적 기사를 행하지 않았으면 십자가에 안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이적 기사가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많은 희생의 대가를 치러서 한번 빵긋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것을 요사스럽게 믿고 그러한 이적 기사로 천지를 수습하고, 인간세계의 모든 것을 청산짓겠다는 황당무계한 패들이 어디 있습니까? 
복귀의 노정을 걸어가신 예수님이 이적 기사를 행한 것은 기뻐서 행한 것이 아닙니다. 기쁘고 편안하여서 이적 기사를 행한 줄 안다면 큰 오해입니다. 이 땅에는 몸 둘 곳이 없고 이 우주 안에는 의지할 곳이 없으니 하늘을 대하여 호소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사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비장한 경지에 있었던 예수님의 간곡한 모습을 바라보아야 됩니다. 예수님이 동정을 안 해줄 수 없는 서글픈 사정에 처하여 손을 들어 ‘아버지시여!’ 하고 부르게 될 때에 여기에서 이적이 벌어진 것입니다. 지극히 슬픈, 뼈 살이 녹아지는 슬픈 장면에서 외치는 그 사정을 통하여 나타났던 것이 이적 기사였습니다.
 선생님이 기도하면 이적 기사를 얼마든지 합니다. 그러나 별의별 일이 다 벌어져도 선생님은 안 합니다. 그것 고쳐 가지고 무엇합니까? 고쳐 줘 봤자 하늘나라에 쓸 것이 있습니까? 아무 필요 없습니다. 몇몇 사람이 한국에서 왕창왕창 했지만, 선생님은 나타나서 그런 일을 안 했습니다. 욕을 먹어도 가만히 있습니다. 혼자 다니면서 선생님의 갈 길을 선생님이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준비를 못한 사람은 흘러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준비를 다 해 놓고 큰 무대인 미국에 가서 들이죄기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잘못했으니 회개하라고 하는 것입니다.